#####기 타#####/정치경제

이길수 없는 적

리마즈로 2019. 7. 18. 19:58


이길수 없는 적(敵)

일본을 배우기 위해 일본에 
갔다가 실컷 얻어 맞고 온 느낌이 든다. 
없는 돈에 큰 마음먹고 안 나오는 
휘파람까지 연습하며 현해탄을 건넜다.
본래 관광 목적인 눈요기는 
한번 본 것으로 족하고 
금방 싫증이 나기 마련이다. 
외국에 가면 꼭 알고 
배우고 싶은 것은 많은데 
문제가 되는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스스로 알려고 하니 시간이 부족하고
서두르니 스승을 찾기 힘이 든다.
다행히 훌륭한 가이드 
선생님을 만나 그동안 보고 
들은 것을 잊기 전에 담아두었다. 
3일 동안의 제한된 시간에 배우고 
느낀 것 중에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기억부터 우선 챙겨 본다. 
일본! 
아, 싫고 미운 나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 와서 한 가지 
더 고약한 감정, 무서움이 추가되었다.
나 자신처럼 
급한 분들을 위하여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기기 힘든 원수의 나라라서 그렇다.
영원히 원수가 될 필요는 없지만,
이길 수 없는 나라가 원수로
남아있는 것은 국가적 재앙이다. 
왜 이길 수 없다고 단언하는가?
스스로 묻지 않을 수 없다. 
아주 간단한 몇 가지만으로 
속단한다고 핀잔을 해도 좋다.
"하나를 보고 열을 안다."라는 말이 
꼭 자신을 위해 준비된 말은 아니다. 
더구나 인간의 가치는, 
당사자가 추구하는 선과 악 중에
품성 한 가지로 결정되는 것이다.
일견하여 필자가 본, 
일본인들의 가치를 결정해주는 
몇 가지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한다.
바람에 날려온 가랑잎
하나도 광장에서 볼 수 없고
담배 꽁초 한 개비도 
길거리에서 구경할 수 없다. 
소형 재떨이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껌 통에 씹고 난 껌을 싸서 
버리는 휴지도 같이 들어있다. 
3일 동안 주택가 길거리에서 
시내 도심에서 고속도로에서
아직은 괜찮은 시력으로 일부러
찾아 보았지만 수입 외제차량 
단 한 대도 볼 수가 없어 
머리카락이 서서히 곤두섰다. 
좌측통행에 익숙지 못 해서 
그런 줄 알고 오른쪽 눈에 힘을 주어도
마찬가지니 드디어 양눈에 뿔이 났다.
내가 사는 미국에서는 
열대 중에 세 대만이 미국산 차량이고, 
수입차 일곱 대 중 네 대가 일본 차인데
자유 무역협정이 무색하도록
철저한 배타주의의 이 민족성이
소름 끼치도록 무서워졌다.
등굣길에 건널목을 건너는시골 
초등학교 어린이들의 모습을 보았다. 
고학년의 큰 학생들이 건널목
양쪽에서 깃발을 들어 차를 세운다. 
길 양쪽에서 저학년의 
어린 학생들이줄지어 서있는 
차량을 향해 동시에 고개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하고
고사리 손을 흔들며 차례를 
지켜 질서 정연하게 길을 건넌다.
아이들이 
길을 다 건넌 것을 확인한 후 
차량의 어른들도 웃으며 
경적으로 답례를 한다. 
이 얼마나 인간의 가치를 극대화하는, 
아름다운 사회의 시민 정신인가?
가정에서 키워지는 일본 
어린이들의 사회교육에 관한 
극히 일부분을 예로 든 것이다. 
등굣길을 같이 지켜본 
가이드의 보충 설명 중에
오아시스'란 말이 
신선한 충격으로 전해온다.
오: 오하요우 고자이마쓰 
(아침인사, 안녕하세요).
아: 아리가또우 고자이마쓰
(감사합니다).
시: 시쯔레이 시마쓰 (실례합니다).
스: 스미마셍(죄송합니다).
일본인들은 길을 가다가도 
자주 뒤를 돌아본다고 한다. 
혹시 자신이 뒤따라오는 사람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까 배려하는 마음에서다. 
"강남의 귤을 강북으로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된다(남귤북지;南橘北枳)." 
안자춘추(晏子春秋)에 나오는 옛이야기다.
일본과 한국 중에 어디 가 
강남인 줄은 잘 몰라도 
한국에는 왜 아직 탱자만 열리는가? 
우리도 한국의 강남땅에 어서 빨리
일본처럼 '오아시스'를 만들어 어린
귤 나무를 많이 심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길 수 없는 
원수를 영원히 옆에 두고 
어찌 발 뻗고 편히 잠을 자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