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 정승이 내린 명판결
황희 정승의 장수비결
황희(黃喜, 1363~1452)는 고려 공민왕 때 태어나
조선 문종 임금 때 세상을 떠났습니다.
명재상이자 청백리로 잘 알려진 인물이며
특히 조선조 최장수 재상이었죠.
고려말에 27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나 2년여 만에 고려가
망하는 바람에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였습니다.
그러다 2년이 지나 조선 조정의 요청과 두문동
동료들의 천거로 성균관학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60세에 우의정, 65세에 좌의정, 69세에 영의정이
되어 87세에 물러났으니 최고의 벼슬인
영의정으로만 18년을 지내며 국정을 통괄하였습니다.
그는 정치 일선에서 원칙과 소신을 견지하면서
도 때로는 관용의 리더십을 발휘하여, 건국 초기
조선의 안정에 기여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요.
▲ 황희 정승 초상화.
황희 정승에 대한 재미난 일화 2가지
어느 날 황희 정승에게 집안의 하인 부부 중에
아내가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아버님 제삿날인데 저희 개가 새끼를 낳았습니다.
아무래도 제사를 안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승이 말하길, “안 드려도 되지.”
그런데 조금 있다가 남편 하인이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아버님 제삿날에 저희 개가 새끼를 낳았지만
그래도 제사는 드려야겠지요?”
황희 정승이 답하기를 “제사 드려야지.”
그러자 옆에 있던 정승의 부인이
“대감께서는 어찌 같은 일에 둘 다 옳다고
하십니까?”라고 핀잔을 줬습니다.
황희 정승이 공무에 잠깐 짬을 내어
집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집의 여종 둘이 서로 시끄럽게 싸우다가 잠시 뒤
한 여종이 와서 “아무개가 저와 다투다가
이러이러한 못된 짓을 하였으니 아주 간악한
년입니다”라고 일러 바쳤습니다.
그러자 황희는 “네 말이 옳다”고 하였습니다.
또 다른 여종이 와서 꼭 같은 말을 하니
황희는 또 “네 말이 옳다”고 하였죠.
마침 황희의 조카가 옆에 있다가 답답해서
“숙부님 판단이 너무 흐릿하십니다.
아무개는 이러하고 다른 아무개는 저러하니
이 아무개가 옳고 저 아무개가 그릅니다”하며
나서자 황희는 다시 또 “네 말도 옳다”고 하며
독서를 계속하였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황희 정승이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솔로몬처럼 지혜로운 판단을 내려서 시시비비를
가려주지 못하고 너무 줏대 없는 판단을 내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할 겁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서로 상반되고 대립되는 것을
하나로 포용하는 관용(寬容)의 정신을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지요.
그리고 제삿날에 개가 새끼를 놓은 것에 대해
부인의 핀잔을 듣고 한 답변이 있습니다.
“아내는 제사 드리기 싫어하기에 지내지 않아도
된다고 한 것이고, 남편은 제사 드리고 싶어 하기에
제사 드리도록 했을 뿐이오”라고 말했답니다.
얼마나 현명한 판단입니까?
다른 사람의 입장을 충분히 배려할 줄 아는
자세로 볼 수 있는 것이죠.
황희 정승은 노비에 대해서도 관용을 베풀 줄 알았고,
자신의 집에 있는 배를 따려는 젊은이를 꾸짖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집 시동을 시켜 배를 따다 주는 관용의
미덕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관용과 포용이 생활화된다면 마음병이 생기지 않을
것이고 성인병도 생기지 않으니 장수할 수 있겠죠.
소신과 원칙을 지킨 것이 장수비결
황희는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침착하였습니다.
사리가 깊고 청렴하며 충효가 지극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관직생활에 있어서 소신과 원칙을 지켰습니다.
태종이 양녕대군을 세자에서 폐하고 충녕대군
(뒷날의 세종대왕)으로 교체하려고 하자
대부분의 신료들은 지지했지만 이조판서로 있던
황희는 끝까지 주장을 굽히지 않고 반대하다가
결국 귀양을 갔던 적이 있습니다.
소신과 원칙을 지키면서도 때로는 관용을 베풀 줄
알았기에 24년이나 재상의 자리에 있을 수 있었고,
영상의 자리에 18년이나 머무를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사실 영의정을 그렇게 오래 하면서 무탈하게
오래 살기도 쉽지 않지요.
갈매기와 더불어 여생을 보내다
조선조에서 황희처럼 재상까지 역임하였으면서도
청백리로 선정된 인물은 18명 정도에 불과합니다.
물론 황희도 53세 때 뇌물을 받아
‘황금대사헌(黃金大司憲)’이라고 불릴 정도로
비난을 받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검소하게 살면서 기름진 음식을 즐기지
않았기에 장수했지 않았나 싶습니다.
황희는 87세에 영의정에서 물러나 파주의 임진강변에
지은 ‘반구정(伴鷗亭)’에서 여생을 보냈습니다.
반구정은 갈매기와 여생을 보내려고 만든 정자라는
뜻인데, 황희 사후에 폐허가 되었다가 후손에 의해
중수되면서 미수 허목이 기문을 지었습니다.
‘물러나 강호(江湖)에서 여생을 보낼 적에는
자연스럽게 갈매기와 같이 세상을 잊고
높은 벼슬을 뜬 구름처럼 여겼으니, 대장부의 일로
그 탁월함이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겠다.’
당대에 부러울 것이 없던 황희였지만 평소 미물인
갈매기와 더불어 살려는 마음을 가졌지 않았나
싶습니다.
▲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누정 반구정.
황희가 87세의 나이로 18년간 재임하던 영의정을 사임하고
관직에서 물러난 후 갈매기를 벗삼아 여생을 보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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