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 정승과 계란유골 설화
조선의 황희 정승은 성품이 청백하고 소탈하여 많은
일화를 남겼지요.
그는 당시 높은 벼슬자리에 있으면서도 몹시 가난하게
살았어요.
그가 사는 초가집은 비가 많이 오면 빗물이 새고,
쌀독에 쌀이 떨어지는 날도 자주 있었어요.
하루는 임금이 황희 정승을 도와줄 방법을 생각했어요.
'음, 황 정승이 사는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도와줄 마땅한 방법이 없을까?'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임금은 무릎을 탁 쳤어요.
'옳거니, 그러면 되겠구나!'
임금은 신하를 불렀어요.
"여봐라!
내일 하루 동안 남대문을 드나드는 물건을 몽땅 사서
황희 정승의 집에 갖다 주도록 하여라!"
이렇게 명을 내리고 나서 임금은 몹시 흐뭇했어요.
하루 동안 성문을 드나드는 물건의 양은 꽤 많았거든요.
'이젠 황 정승의 살림도 좀 나아지겠지.'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하필 그날 아침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던 거지요.
비는 하루 종일 그치질 않았어요.
그러니 성문을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어지는 건
당연했지요.
겨우 성문을 닫을 무렵이 되어서야 어떤 시골 노인이
계란 한 꾸러미를 들고 들어왔어요.
그리하여 결국 황희 정승에게 돌아간 것이라곤
계란 한 꾸러미가 전부였어요.
황희 정승은 처음엔 이것마저도 받지 않으려고 했어요.
"아니, 이유 없이 이런 물건을 받다니…… 안 될 말이오!"
"이건 임금님의 특별한 명령으로 가져온 것이니
받으셔도 상관없습니다."
"그럼, 이웃의 가난한 사람에게나 갖다 주시오."
"그래도 이건 임금님께서 주신 건데…."
한참 동안의 실랑이 끝에 황희 정승은 계란을 받았어요.
그날 저녁이었어요.
밤늦게까지 독서를 하던 황희 정승은 배가 출출했어요.
'음…. 그 계란이나 삶아 먹어야겠군.'
그러나 계란을 삶고 보니 속에 뼈가 있어서
하나도 먹을 수가 없었어요.
아마도 병아리가 되려던 계란이었던가 봐요. 본래도
욕심이 없긴 했지만 정말로 운수가 없는 정승이었지요.
'계란유골',
즉 계란에도 뼈가 있다는 말은 여기서 비롯한 말이에요.
이는 운이 나쁜 사람은 좋은 기회를 얻어도
별 이득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옛 속담에 '재수가 없으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는
말이 있는데, 이와 비슷한 뜻이라고 할 수 있어요.
* 황희(1363~1452)
조선의 5대 정승 중 한 명으로 꼽히는 황희.
그는 고려 말 과거에 급제했지만 나라가 멸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가 머문다.
그러나 그를 알아본 태조 이성계에 의해 1394년
성균관학관으로 다시 정치에 발을 들여 놓은 뒤
세종과 문종 때까지 무려 5명의 임금을 모신다.
그는 평생 검소한 생활과 겸손한 자세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다.
왕자의 난으로 정권을 잡아 신하들도 벌벌 떨던
조선의 3대 임금 태종도 황희 정승을 두고,
"공신은 아니지만 나는 공신으로서 대우했고,
하루라도 접견하지 못하면 반드시 불러서
접견했으며, 하루라도 좌우를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라고 할 정도였다.
황희 정승의 현명함과 검소함은 여러 이야기를
만들어 낼 정도로 유명했는데,
압구정과 반구정의 비교도 그 중 하나다.
압구정은 조카인 단종을 폐위시킨 세조 때 재상으로
이름을 날린 한명회의 정자로 지금의 서울 압구정동에
자리했다.
반구정은 파주 문산읍 임진강변에 위치한 정자로
황희 정승이 세종 때 벼슬에서 물러나 머물던 곳이다.
훗날 사람들은 청렴 강직했던 명재상 황희 정승과
권력에 기대어 평생 호사를 누렸던 한명회를
두 정자에 빗대어 이야기했다.
재물에 욕심이 많았던 한명회가 명당으로 꼽은 압구정은
지금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번화가다.
반면 평생 검소하고 겸손히 살다 간 황희 정승의 반구정은
지금도 조선의 선비 정신을 드러내는 문화재로 잘
보존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