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대표적 현모양처는 의례 신사임당을 말한다. 과연 신사임당은 현모양처 였을까? 신사임당은 알려진 것처럼 현모양처가 아니었다고 한다.
- 강릉 오죽헌 -
사임당 신씨.본명은 신인선. 신사임당은 큰 부자집 딸로 태어났다. 노비들이 무려 172명 이나 되는 갑부집 딸 이었다. 강릉 관광지의 하나인 오죽헌도 신사임당네 집이다.
신사임당은 19세에 결혼을 했다.
사임당의 아버지는 딸이 고생을 할까봐 사위를 데릴사위를 하는 조건으로 결혼했고, 사위는 처가살이를 했다. 신사임당은 친정에서 20년이상 살았으며,시집살이 따위는 모르고 살았다.
사임당은 어릴 때부터 재능이 뛰어났다. 7살 때 안견의 그림을 모작을 하고, 그의 예술성은 임금도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까지 소문이 났었다.
그런데, 신사임당의 남편 '이원수' 는 한심스러울 정도로 무능한 사람이었다. 남편 이원수가 과거 시험준비를 위해 10년간 별거를 약속하고 산으로 들어갔으나 얼마뒤 집으로 돌아온 적이 있다. 그러자 남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은 그녀는, 가위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르며 공부를 하지 않으면 비구니가 되겠다고 협박했다.
그렇게하여 남편이 3년간 학문에 정진할 수 있도록 했다.
훗날 이원수가 낮은 관직에라도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우유부단한 그의 성격을 컨트롤한 신사임당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원수가 과거 시험을 보러 갔다가 낙방하고 돌아올 때였다. 날이 저물어 산골 주막집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는데. 주막집 주인 여자가 젊은 과부였다.
집에 돌아온 이원수는 소문이 날까 두려워 아내에게 미리 "주막집 과부가 나를 유혹했지만 내가 안넘어갔다" 고 큰소리를 하며 자랑을 했다.
하지만 며칠 뒤 그 주막집 과부가 이원수를 찾아왔고 할 수 없이 한집에서 두집 살림을 했다. 그런데 그 과부는 술 주정뱅이에 행패가 심한 여자였다.
신사임당에게는 남편의 외도가 큰 정신적 충격이었으며 집안 일과 아이들을 홀대할까 염려하여 남편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은 뒤에라도 “절대 그여자와 재혼하지 마시요”하고 부탁했지만 남편은 자신보다 스무살이나 어린 그술집 작부와 결혼을 했다.
현모양처란, ‘시부모님을 잘 모시고 남편에게 순종하고 내조를 잘 하고, 아이들을 잘 키우는 여자’라는 뜻인데, 신사임당은 처음부터 이에 부합되지 않는 여자였다.
신사임당은 결코 순종적인 여성이 아니었다. 남편보다 똑똑해서 늘 자신의 의견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당찬 여인이었다.
훌륭한 어머니상으로 알려졌지만 신사임당은 자식들을 철저하게 교육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일곱 명의 아이를 ‘방목’하듯이 키웠다.
그녀의 자식들 중 가장 유명한 우리나라 최고의 학자 율곡도 자신의 어머니를 묘사할 때 교육 부분보다 그녀의 성격이나 재능을 주로 말할 정도로 신사임당은 자식에게 해준 것이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신사임당을 어떻게 현모양처라고 부르게 되었을까?
이는 율곡의 제자 송시열이 사임당의 그림에 찬사를 하며 “율곡을 낳으실 만한 훌륭한 분이시다" 라는 말을 하며, 자신의 스승인 율곡에 대한 존경을 표하면서 시작되었다.
송시열은 자신의 스승을 추켜세우고자 했는데,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는 워낙 무능한 인물이라 자랑할것이 없고 결국 어머니인 신사임당을 현모양처로 추앙하는 말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면서 율곡의 명성을 드높인 것이다.
- 신사임당의 草蟲圖 8개 -
그런데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신사임당은 현모양처가 맞다.
나이가 쉰이 넘도록 일정한 수입 없이 과거 공부를 하던 남편을 대신해 집안의 대소사를 관리하며 일곱명의 자녀를 키워냈다.
신사임당이 자녀들에게 해준 것이 없는 어머니로 평가되지만, 21세기 기준으로 보면 그녀는 매우 창의적이고 열린 사고방식으로 아이들을 대한 어머니다.
신사임당은 아이들을 직접 가르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먼저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아이들 앞에서 늘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어 창의력을 키울 수 있게 도왔다.
또 아이들에게 효도하라고 강요하는 대신 자신의 부모에게 효를 행했다. 자신의 삶을 통해 모범을 보였다고 할수 있다.
또 신사임당은 조선시대 였지만 아들과 딸을 차별하지않고 가르쳤다. 큰딸 매창은 어머니를 닮아 시·서화에 능했는데, 신사임당은 딸의 재능을 살려 예인(藝人)의 길을 갈수 있도록 독려했다.
딸 梅窓의 "梅花圖"(5만원권 뒷면에)
신사임당은 자신의 재능도 결혼을 이유로 희생하지 않았다. 일곱 살부터 시작한 그림을 출산과 육아 중에도 손에서 놓지 않고 꾸준히 이어나갔다.
학문도 늘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바쁜 와중에서도 책을 읽지 않은 날이 없었다. 자식들이 장성한 뒤에는 편지를 주고 받으며 학문적인 논의를 했다.
그녀는 가르치는 사람이나 부모로서가 아니라 함께 배우는 사람으로 자식들을 대했다.
훗날 율곡 등 후손들은 그녀를 ‘희생적인 어머니’가 아니라 '교훈을 주는 스승’으로 보았다.
신사임당의 아들 "이우" 의 菊花圖
사임당은 결국 남편과는 동등한 위치에서 집안을 함께 운영하고,
아이들에게는 스스로 깨우칠수 있게 한 여성이었다.
이것이 21세기에 현모양처로 보는 신사임당이다.
신사임당은 남편에게 순종하고 헌신한 조선시대 현모양처가 아니라 적극적이고
당당하게 수신제가에 힘쓴 여성으로 21세기에 본받아야 할 여성상 인것이다.
5만원권지폐, 앞면은 신사임당, 뒷면은 딸 매창의 그림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5만원권 지폐의 얼굴로 신사임당이 결정되었을 때 많은 사람이 반대했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유관순 열사도 아닌 신사임당은 21세기 여성상을 대표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사물에는 양면이 있듯 생각하기에 따라 이것도 될 수 있고 저것도 될 수 있는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된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