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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세사의 재인식(2)

리마즈로 2020. 6. 9. 12:18

최근세사의 재인식(2)
朴暎根 논설고문ㆍ신중년사관학교 명예총장

 

이 때 서독은 이미 선진국의 반열에 들어간 상태로 차관이 가능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독일어를 구사할 수 있어야 협상도 하고 구걸도 할 수 있는데, 독일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한국에는 한 사람도 없었으니 당시의 우리수준이 어떠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독일 대사관에 연락하여 수소문 한 결과 한 사람을 발견하였다.
그 분이 현재 한국산업개발연구원 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백영훈 박사다. 전북 김제 출신으로 26세 때,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독일 뉘른베르크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귀국 후 중앙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최고회의에서 찾아 갔으나 병력미필자라 하여 논산훈련소에 입소, 훈련 중이었다.

정부는 훈련병이던 백영훈 박사를 특진시켜 상공부에 파견, 장관 경제 고문 및 특별보좌관으로 임명, 이미 구성되어 있던 ‘차관 교섭 사절단’과 함께 1961년 11월 서독에 갔다. 정래혁 상공부 장관을 단장으로 한 차관단은 도이치뱅크를 비롯하여 민간은행, 정부 기관 등에 차관을 타진하였으나 제3국의 지불보증이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당시 한국을 상대로 지불보증 할 나라는 이 지구상에 한 나라도 없었다. 결국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독일에 빌리려는 차관은 1억5000만 마르크, 달러로 환산하면 3500만 달러 정도였는데, 격세지감을 금할 수 없는 것은 2019년 1월 현재, 한국은 총 외환 보유액 4055억 달러를 넘어섰다.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차관단은 독일에 체류하면서 딴 방법은 없을까 하여 백방의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백 박사는 모교인 뉘른베르크대학의 은사가 본 대학에 재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찾아가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였으나 한마디로 불가능하다는 답변이었다. 사실 한국이 독일에 차관을 받겠다는 발상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불가능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그날부터 백 박사는 지도교수님의 부인에게 매달렸다.

 

매일 아침 출근 시간 전에 문 앞에 대기하다가 교수님 떠나고 나면, 사모님을 만나서 교수님이 앞장서줄 것을 눈물로 호소하였다. 너무나 간절하였든지 부인의 간곡함과 제자의 딱한 사정을 외면하지 못한 교수님이 앞장섰다. 교수님이 연락이 왔다. 3일 후에 다시 오라는 것이다. 약속한 날, 희망은 없지만 그래도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찾아가니, 대뜸 하는 말이 “너의 나라에 실업자가 얼마나 되느냐” 묻는 것이었다. 백 박사는 “전 국민이 실업자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사실 당시에 우리 실정이 농ㆍ어업 인구가 전 국민의 85%나 되었고, 그것도 손바닥만 한 토지가 전부였으니 실지로 전 국민이 실업자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대안이 제시된 것이 광부와 간호사의 독일 취업이었다. 당시 독일은 이미 선진국 경제로 진입한 지 오래되었고 따라서 노동 인구가 부족하였으며 특히 3D 업종을 기피하는 현상이 심화되면서 광부나 간호사가 절대 부족한 실정이었다.

 

우리 광부들과 간호사들이 받는 한 달 임금은 400마르크, 미화 100달러였다. 이들이 받는 월급을 1개월간 은행에 예치하였다가 한국에 송금하도록 하였으니, 즉 광부와 간호사의 월급이 보증금이 되었던 것이다. 제1차로 지하 1,300m에서 일할 광부 5천명, 야간에만 일할 간호사 2,000명을 선발하는데 광부로 지망한 사람이 4만 명, 2,000명 선발하는 간호사직을 지망한 사람이 2만 명, 광부로 지망한 사람의 태반이 고등학교 졸업생이며 그 중 35% 정도가 학사학위를 가진 대학 졸업생이었다.
광부모집에 왜 대학 졸업생이 지망하였을까? 첫째는 대학을 나와도 취직할 직장이 없으니 광부라도 하겠다는 것이고, 무엇보다 임금이 국내 최고의 직장보다 4~5배가 많았으니 지하 1,300m, 용광로 같은 곳에서 일하겠다고 아우성을 친 것이다. 합격의 조건은 손에 굳은살이 얼마나 있느냐가 기준인데, 합격하려고 강가에서, 밭에서 손에 피가 나도록 삽질, 곡괭이질을 하여 굳은살을 만들어 합격하기도 하였다.

 

1963년 11월 28일, 제1진 150명이 떠나는 김포공항은 눈물바다였다. 제2진, 제3진 서독에 간 광부들은 하루, 근로기준법에 의하여 하루 8시간을 일하게 되어 있는데, 우리 광부들은 모두가 16시간을 계약하였다. 어떤 사람은 24시간 하겠다고 하여 매니저와 다투기도 하였는데 ‘당신은 잠도 자지 않고 일하느냐’ 하니까, “우리 국민들은 6 ᐧ 25 전쟁 때, 눈뜨고 자는 버릇이 생겨, 자면서도 일할 수 있다고 고집을 피웠다”는 웃지 못할 기록도 있다.
지하 1,400m, 막장에 내려가면 불덩어리다. 팬티만 입고 일하는데 30분마다 물을 먹지 않으면 탈수현상이 오는 최고의 열악한 환경에서 이를 악물고 일하는 것을 보고, 독일 사람들이 이런 지독한 민족은 처음 봤다면서 감독이 감독할 필요가 없다고 철수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