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 타#####/정치경제

모택동과 참새의 저주

리마즈로 2018. 7. 14. 17:48


섬기는 지도자 와 대중적 지도자 여기서 ‘섬기는 지도자’라 한다면 아부적인 표현이 된다. 진정한 지도자는 수레를 끄는것이 아니라 뒤에서 미는 것이다. 그리고 평등에 원칙을 다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대중적 지도자를 말 함이다. 모택동과 참새의 저주 중국 대약진운동(1949~1959) 당시 약 4천만 명을 굶어 죽인 모택동의 실책에 대한 일화이다. 그가 최고 지도자로 중국을 통치하면서 많은 오판과 시행착오로 엄청난 인민을 굶어 죽였고 살아남은 인민들에겐 기아의 고통을 안겨 준 인물이다. 아마 공산주의가 아니고 민주사회였다면 모택동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중국 공산당 간부들 누구하나 직언을 하거나 반기를 들지 못했다. 숙청이 두려웠고 모택동의 주장에 대응할 만한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대약진운동이라는 명분으로 공산혁명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이 아니었던가? 최고지도자 모택동이 1958년 농촌을 순시하던 중 곡식 낟알을 쪼아 먹는 참새를 노려보며 한 마디 했다. “저 참새는 해로운 새다.” 가뜩이나 식량이 부족한데 참새가 그 귀중한 곡식을 쪼아 먹는 것을 보고 화가 난 것이다. 모택동의 말 한 마디에 중국이 발칵 뒤집혔다. 당은 부랴부랴 <참새박멸총지휘부>를 설치하였고 얼치기 지식인과 열성 공산당원들이 바람을 잡았다. 국영 연구기관도 '참새 1마리가 매년 곡식 2.4kg을 먹어치운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하여 모택동 교시에 힘을 실었다. 참새만 없애도 70만 명이 먹을 수 있는 쌀을 더 수확할 수 있다며 모택동의 혜안을 추켜세우며 맞장구를 치고 찬사를 보냈다. 드디어 방방곡곡에서 소탕작전이 벌어졌다. 어른이고 애들이고 새총(고무총)을 들고 다니며 참새를 쏘아 죽이는 일에 동원되고 10억 인구가 곳곳에 진을 치고 냄비와 세숫대야를 두드리며 참새를 쫓아다녔다. 참새는 새총에 죽지 않더라도 사방에서 들리는 냄비와 세숫대야 소리에 놀라 하늘로 날았고 앉을 틈도 주지 않고 계속 쫓다보니 참새가 날다 기진맥진 땅에 떨어저 죽었다. 모택동 한마디에 참새 약 2억1천만 마리를 소탕하고보니 중국 땅에 사는 참새는 거의 멸종 위기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누구하나 감히 "이건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또 그럴 분위기도 아니었다. 이제 70만 명이 먹을 곡식이 더 수확될 것이라고 기대했건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해충의 천적 참새가 사라지자 메뚜기를 비롯해 해충이 창궐했고 농작물은 해충의 피해로 거의 초토화됐다. 결국 참새를 박멸한 첫해부터 대흉작을 맞게 되었고 인류 최악의 참사가 중국의 대약진운동 때 벌어진 것이다. 1958년부터 3년 동안 중국인 4,000만 명의 죽음은 모택동의 한마디에서 출발한 참화가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이 절대 권력자의 말 한마디를 아무런 검토 없이 실행에 옮기다 보면 재앙적 비극은 당연한 결과가 아닐 수 없다. 모택동은 뒤늦게 문제점을 깨닫고 소련 연해주 참새 20만 마리를 수입했으나 들녘을 휩쓸고 있는 해충 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더구나 그 다음 해 농사에 문외한인 모택동은 궁여지책으로 벼를 빽빽하게 심도록 지시한 것도 또 한 번의 패착이었다. 벼와 벼 간격을 최소화하면 소출량이 늘어날 것으로 판단하고 어리석은 결정을 시행했지만 이 또한 결과는 정반대였다. 벼를 촘촘히 심으면 서로 성장을 방해하고 병충해에 더욱 취약해지면서 아예 낟알이 여물지 못한다. 결국 절대 권력자가 즉흥적으로 내놓은 식량 증산 계획은 모두 대실패로 끝이 나고 말았다. 식량증산 계획의 실패로 굶어 죽은 사람이 1천만 명이라고 공산당은 발표했지만 실제 사망자는 최대 4천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중국 공산당의 실패를 교훈삼아 아무리 긴박한 국가 기간산업 일지라도 전문기관의 검증 없이 지도자의 말 한마디에 즉흥적으로 집행할 경우 실패는 불을 보듯 뻔한일이다. - 옮겨온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