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도 사랑합니다
시인 박목월이 중년의 나이로
그의 제자와 사랑에 빠져 종적을 감추었다.
서울대 교수라는 명예도 가정도 버리고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목월의 부인은 얼마 간의 시간이 지난 후.
그들이 제주도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 나섰다.
부인은 남편과 그 여인을 어렵사리 만났다.
그리고 궁핍한 생활을 목격한 부인은
"힘들고 어렵지 않으냐" 며 돈 봉투와 겨울 옷을
내밀며 "추운겨울 따뜻하게 지내라"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목월과 그 여인은 이에 감동받고 가슴이 아파
그 사랑을 끝내기로 하였고
목월은 시를 지어 그녀에게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 ~ 아 ~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한 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 ~ 아 ~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 두고 홀로 울리라.
아 ~ 아 ~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이런 박목월의 아들인 박동규 서울대 명예교수는
그의 어머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회상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영리하고 똑똑하다는 우리 어머니!]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6.25전쟁이 났다
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 말씀하시고,
한강넘어 남쪽으로 가셨다
"어머니말씀
잘 듣고 집 지키고 있어."
그 당시 내 여동생은 다섯 살이었고,
남동생은 젖먹이였다.
인민군 치하에서 한 달이 넘어도 국군은 오지 않았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찾아 남쪽으로 가자고 하셨다.
우리 삼 남매는 어머니를 따라 1주일만에 닿은 곳이
평택항구 옆 어느 바닷가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전쟁중이라 아무도 우리를 집안에 듵이지 않아
우리는 어느 집 흙담옆에 가마니 두장을 깔고 자야만
했다.
또한 먹을 것이 없었던 우리는 개천에 가서
작은 새우를 잡아 오고 담장에 뻗은 호박잎을 따서
죽처럼 끓여서 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담장집 여주인이,
"호박잎을 너무 따 버리면 호박이 열리지 않는다."며
다른 데 가서 자라고 하였다.
그날 밤 어머니는 우리가 더 이상 아버지를 찾아다닐 수
없으니 집에 가서 아버지를 기다리자고 하셨다.
어머니는 신주처럼 소중한 재봉틀을 쌀로 바꾸어
자루에 끈을 매어서 나에게 지우시고 어린 동생들과
서울로 출발 하셨다.
수원부근에서 산길을 가고 있을 때 어느 청년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무겁지. 내가 좀 져 줄까 ?!"
"아저씨, 감사해요." 나는 쌀자루를 맡겼다
쌀자루를 짊어진 청년의 발길은 빨랐고
나는 그를 따라 한참을 가다 보니 뒤 따라 오시는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를 놓칠까봐
"아저씨, 여기 내려 주세요!
어머니를 기다려야 해요."
"그냥 따라와!"
어머니가 걱정되어 뒤를 돌아보며 저만큼 뒤처져
따라가고 있는데 둘로 갈라지는 길이 나왔다.
청년을 따라 가면 어머니를 잃을 것 같고
그냥 앉아 있으면 쌀을 잃을 것 같았다.
당황하여 큰 소리로 몇 번이나
아저씨를 불렀지만, 그 청년은 뒤도 돌아 보지않았다.
나는 그냥 주저앉아 있었다.
어머니를 놓칠 수는 없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 어머니가 동생들을 데리고 오셨다.
길가에 주저앉자 울고 있는 나를 보시더니, 첫 마디가.
"쌀자루는 어디 갔니?"
나는 청년이 져 준다더니 쌀자루를 지고 저 길로
갔는데, 어머니를 놓칠까봐 그냥 앉아 있었다고 했다.
순간 어머니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리고 내 머리를 껴안고 한참을 우시더니.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에미를
잃지 않았네!."
그날 밤 어머니는 삶은 고구마를 얻어 오셔서
내 입에 넣어 주시며,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아버지를 볼 낯이 있지!"
하시면서 울먹이셨다.
생명줄 같았던 쌀을 잃어버린 나를
영리하고 똑똑하다고 칭찬해 주신 어머니!.
그 후 나는 어머니에게 영리하고 똑똑한 아이가 되는
것이 내 소원이 되었고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살아왔다.
오늘따라 어머님을 불러보고 싶네요
얼마나 아프셨는지요?
그렇게 아픈데 어떻게 사랑하셨나요 ?